목차
1. 무너진 세상 속 권력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2. 아파트라는 공간이 가지는 한국 사회의 심리적 의미
3. 유토피아인가, 디스토피아인가를 가르는 경계의 작동 방식
개요 : 드라마 · 대한민국 / 130분
개봉 : 2023. 08. 09
감독 : 엄태화
주연 : 이병헌(영탁), 박서준(민성), 박보영(명화), 김선영(금애), 김도윤(도균), 박지후(혜원) 등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2023)*는 대지진으로 모든 것이 무너진 서울을 배경으로, 단 하나 남은 황궁아파트에 사람들이 모여들며 벌어지는 갈등과 심리, 권력 구조를 다룬 재난 영화다. 단순한 생존이 아닌, 인간성과 공동체, 공간의 상징성이 교차하는 이 영화는 한국 사회의 현실과 욕망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만든다. (*영화 내용 및 결말 스포일러를 포함할 수 있음)
무너진 세상 속 권력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영화는 시작부터 ‘대지진’이라는 설정으로 기존 사회 구조를 일순간에 붕괴시킨다. 대부분의 공간과 질서가 사라진 후에도 유일하게 살아남은 황궁아파트는 자연스럽게 새로운 공동체의 중심지가 된다. 이 공간은 단순한 생존처를 넘어, 권력을 쥐고 지배하려는 사람들의 새로운 무대가 된다. 초반에 등장하는 ‘영탁’은 주민들을 안전하게 보호하겠다는 명분으로 리더가 되지만, 그의 리더십은 점차 통제와 폭력으로 변질된다. 그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외부인을 배제하고, 내부의 반대 의견을 억압하며, 질서를 가장한 지배 체계를 구축한다. 이는 전통적인 ‘카리스마형 리더’가 어떻게 독재자로 전환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서사다. 또한 주민들 다수는 영탁의 행동이 비인도적임을 알면서도 불안과 생존 본능에 휩싸여 침묵하거나 동조한다. 권력은 무너진 공간 속에서 우연히 주어지기도 하지만, 그것을 유지하는 방식에 따라 인간성과 윤리를 시험하게 된다. 이 영화는 재난이라는 극한 상황 속에서도 권력이 탄생하고 작동하며, 그 과정에서 인간의 도덕성과 공동체의 본질이 시험받는다는 사실을 여실히 드러낸다.
아파트라는 공간이 가지는 한국 사회의 심리적 의미
‘황궁아파트’는 단지 영화의 배경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심리를 응축한 상징적 공간이다. 영화는 아파트를 단순한 ‘살 집’이 아닌, 권력과 배제, 소속과 불안을 동시에 의미하는 공간으로 묘사한다. 한국에서 아파트는 재산과 계급, 안정과 불안을 상징하는 대표적 공간이다. 극 중 아파트에 살고 있는 주민들은 ‘이 안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생존권을 보장받으려 하고, 외부에서 찾아오는 사람들을 철저히 경계한다. 이는 물리적 공간이 심리적 경계로 전환되는 지점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또한 아파트 내부의 구조 자체가 통제와 감시를 용이하게 만든다. 엘리베이터, 현관 출입 시스템, 주민 회의 등 일상의 요소들은 재난 상황에서도 그대로 유지되며, 오히려 통제 도구로 기능한다. 이처럼 아파트는 개인을 보호하면서도, 동시에 공동체 내 타인을 경계하고 배제하는 폐쇄성을 강화하는 이중적 공간이다. 영화를 통해 관객은 평소 너무도 익숙한 주거공간이 위기 상황에서 얼마나 쉽게 배타적이고 권위적인 공간으로 전환되는지를 체감하게 된다. 이는 아파트라는 공간이 단순히 물리적 구조물이 아니라, 현대 한국 사회의 불안과 욕망이 얽힌 복합적인 심리적 기제임을 암시한다.
유토피아인가, 디스토피아인가를 가르는 경계의 작동 방식
‘콘크리트 유토피아’라는 제목은 역설적이다. 영화 속 아파트는 외부보다 상대적으로 안전하고, 물자도 어느 정도 공급되며,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운영되는 곳이지만, 실상은 디스토피아에 가깝다. 유토피아를 가장한 그곳에서는 소수의 권력자에 의해 질서가 강제되고, 구성원들은 생존을 위해 감정과 윤리를 억누르며 살아간다. 특히 ‘경계 짓기’는 이 공간을 유지하는 가장 중요한 방식으로 등장한다. 아파트 주민과 외부인의 경계, 내부에서의 상하 위계, 남성과 여성, 가족과 비가족 등의 구분은 모두 생존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기준이 되며, 이 기준은 점점 비인간적인 방향으로 흘러간다. 이러한 구조는 우리 사회에서 위기 상황이 닥쳤을 때 작동하는 집단 심리를 상징한다. 즉, 생존을 위해 타인을 타자화하고,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다름을 배척하는 심리는 단지 픽션의 서사만이 아니다. 영화는 이를 통해 “진짜 유토피아란 무엇인가?”,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윤리를 요구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결말부에 이르면 관객은 누구를 옳고 그르다고 단정할 수 없게 되고, 이는 결국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는 공간이 아니라 ‘사람의 태도’에 따라 결정된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재난이라는 틀을 통해 권력, 공간, 심리, 공동체 등 복잡한 사회적 구조를 정면으로 조명하는 작품이다. 아파트라는 익숙한 공간이 인간성을 시험하는 폐쇄적 구조로 바뀌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과연 어떤 공동체를 만들고 있는지를 돌아보게 된다. 지금 우리가 사는 곳은 유토피아인가, 디스토피아인가. 그 질문은 지금도 유효하다.